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기차의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는 통역기를 이용해 외국인과 대화한다. 주머니에서 둥그런 물체를 꺼내 입에 대고 한국말을 하면 영어가 나오는 식이다. 영화 속 장면이 현실화되고 있다. 인공지능으로 견고했던 언어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제공 모호필름
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니는 김은미(가명)씨는 유료 번역프로그램을 이용해 영어 논문을 한글로 번역해 읽게 된 뒤 수업 준비 시간이 크게 줄었다. 텍스트는 물론 피디에프(PDF)로 된 문서도 길어야 몇 분이면 원본 논문의 서식에 맞춰 번역된다. 전문가의 번역처럼 매끄럽고 미묘한 뉘앙스까지 담아내진 못해도 문맥이나 표현은 이해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다. 영어 외 여러 언어로 된 자료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만족도가 높다.
언론사 기자인 박정철(가명)씨도 최근 번역프로그램을 이용해 외국인 교수에게 보낼 인터뷰 질문지를 작성했다. 번역 뒤에는 챗지피티(Chat GPT)에 요청해 ‘정중하고 격조 있는’ 스타일로 매끄럽게 다듬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어 인터뷰 질문지 작성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전문직 업무만이 아니다. 이제 국외여행 등 일상생활에서도 스마트폰의 통·번역 어플을 이용해 외국인과 손쉽게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외국어 번역은 인공지능(AI)이 가져올 세상의 변화를 일상에서 직접 체감하는 영역이다.
기계를 활용한 자동 번역 기술은 역사가 오래지만 최근 인공지능 기반의 ‘신경망 기술’ 실현 뒤 질적 도약을 이뤘다. 사람은 눈과 귀, 촉각 등 감각 기관을 통해 글자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 정보를 뇌에서 다양한 맥락 등을 고려해 번역한다. 인공지능도 사람의 뇌처럼 번역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는 평가다.
최근에는 음성 번역 영역에서도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구글은 지난 3월 100개 이상의 언어를 자동으로 감지해 음성으로 번역하는 인공지능 모델을 공개했고, 지난 8월 메타(옛 페이스북)는 최대 100개 언어를 텍스트와 음성으로 실시간 번역하고 기록할 수 있는 인공지능 모델을 출시했다. 지난 8월에는 에이아이 휴먼(AI Human)을 제작해온 딥브레인에이아이(AI)가 인간의 얼굴을 한 인공지능이 1~2초 안에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시간 통역 기술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는 팟캐스트 방송을 실시간으로 여러 언어로 더빙해 제공하는 서비스를 곧 시작할 예정이다. 스포티파이의 실시간 음성 번역 서비스는 챗지피티를 만든 오픈에이아이의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이루어진다. 특히 “팟캐스트로 출력되는 음성을 원 발표자의 목소리와 스타일에 맞는 다른 언어로 번역해 말하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인공지능 동영상을 제작하는 헤이젠도 유사한 기능의 ‘동영상 번역’을 출시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그녀(Her)’의 여주인공 사만다처럼 인간과 소통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하는 인공지능 음성 비서도 머잖아 현실화할 전망이다. 오픈에이아이(OpenAI)는 다섯 가지 합성 음성 중 하나를 선택해 마치 전화 통화하듯 챗지피티와 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음성 언어는 문자보다 직관적이고 쉬운 의사소통 방법이다. 디지털 기계와 거리가 먼 이들도 쉽게 친숙해질 수 있어 머지않아 일상으로 파고들 가능성이 높다. 이제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하면 음성, 비디오, 이미지 입력까지 처리할 수 있다. 예컨데 냉장고 속 사진을 올린 후 챗지피티에게 관련 재료를 이용한 요리법을 물어보는 식의 구체적 요구도 가능해졌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눈·귀·입을 지니게 되면서 글자 아닌 다양한 형태로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멀티모달’ 시대가 열린 셈이다.
신기술로 인해 언어장벽이 사라질 세상에 대한 기대감 한켠에는 불안과 우려도 있다. 스포티파이처럼 팟캐스트의 목소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동일한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한 디지털 복제본이 생성된다. 이처럼 몇 초만에 음성을 똑같이 합성할 수 있게 되면서 조작에 악용될 가능성도 커졌다. ‘불타는 펜타곤’ 같은 가짜 사진처럼 사진·비디오를 합성해 인물의 발언이나 행동을 조작하는 딥페이크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쉽게 목소리를 복제하고 생성할 수 있게 되면서 성우들은 일자리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에스에프(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귀 속의 번역기 바벨 피쉬나 영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통역기가 현실로 다가온 시대, 외국어 공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미래에도 필요할까라는 무거운 질문도 제기된다.
기계 번역이 개선되어 의존도가 높아지면 표현의 풍부함, 언어의 다양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지난 5월 ‘인공지능 번역 현황과 문학번역의 미래’를 주제로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이창수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인공지능 번역은 기계번역 투로 획일화될 가능성이 크며 표준적인 패턴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빈도가 높은 패턴은 강화되고 빈도가 낮은 패턴은 약화하여 언어의 다양성을 축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언어 본능’에서 언어는 마음의 일부로, 언어를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인간 본성을 통찰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언어가 인간 본성을 들여다보는 창의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국어는 바깥세상의 정서, 사고방식, 정체성,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창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번역이 확산하면서 소수 언어가 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현재 7000개의 언어 중 42%인 3045개 언어가 멸종 위기에 놓여 있으며, 지금도 해마다 9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이중언어 및 심리언어학 연구소 소장인 비오리카 매리언은 지난 4월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느끼고, 통찰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언어가 소멸한다는 것은 고유의 사고와 존재 방식이 무너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는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며, 언어가 소멸하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도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번역 품질이 개선될수록 지배적인 언어, 특히 영어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책, 신문, 온라인 콘텐츠 등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훈련되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품질도 개선된다. 인공지능 서비스를 사용할 때 한국어보다 영어를 사용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언어의 장벽이 낮아질수록 영어의 독점력이 더 커지는 역설이다.
외국어는 ‘지식권력’ 그 자체로 간주되어 왔다. 미국이 패권국가로 등장한 20세기 이후, 영어는 지식을 담는 그릇이자, 인적 교류로 형성된 네트워크를 이용해 권력과 부에 이르는 지름길로 작용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누구나 다양한 나라의 지식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시대, 지식권력으로서 영어, 외국어의 의미는 어떻게 바뀔까? “국외여행이나 물건 구매 같이 정보만 교환하면 되는 일상 행위라면 통번역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앱으로 신뢰와 친밀감에 기반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그런 두터운 네트워크 속에서만 가능하다.” 인문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인공지능 번역이 언어장벽을 허물면서 지식 정보에 대한 접근은 용이해졌지만, 신뢰와 공감의 형성이라는 언어의 본질에는 닿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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